발표의 광장인 [호남평론] 문예란
1935년 4월에"목포평론","전남평론"의 속간호 형식인"호남평론"이 창간되었다. 그런데 이 잡지는 직접 창작에 임하는 김철진(김우진의 아우)이 주간을, 나만성이 편집책임을 맡고 있는 터라서 문예란이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많은 문인들의 발표의 장이 되어 주었다. 물론 발표 작가 중에는 방인근, 이무영, 박화성과 같은 유명 문인도 있지만 대부분 문학동호인들이 더 많았다.아울러 일부 문인은 시와 수필 등 여러 장르를 함께 쓰는가 하면 시대적 상황 탓이었든지 가명, 필명으로 발표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게 당시의 특징이었다.우선 1935년 4월부터 1937년 8월까지 2년 4개월 동안"호남평론"에 발표된 장르별 작가 수를 보면 시 분야에서 53명, 소설 분야에서 17명, 수필 분야에서 22명, 시조(민요, 한시 포함) 분야에서 14명, 희곡 분야에서 10명, 비평 분야에서 3명, 아동문학 분야에서 2명 등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각 장르별 2회 이상 발표한 작가들은 시 16명, 소설 8명, 수필 11명, 희곡 2명, 시조 2명, 아동 2명으로 그중 활동이 가장 왕성한 작가들과 발표 횟수는 다음과 같다.(2회 이상 발표 문인)
- 시 : 이근화(필명 이북초) 14회, 무두인(無頭人) 9회, 나천수 8회, 김중복 6회, 최승년 5회, 이중호 5회, 노변 5회, 천남선 4회, 동인(同人) 4회, 오성덕(오덕) 3회, 박찬일 3회
- 소설 : 최춘열(필명 光山新月) 연재 "낙원" 6회, "쌍복희" 2회, 박덕상 연재 "동냥개", "젊은어머니" 각 4회, 채규호 중편"재출발" 2회, 나만성 '가로에 피는 꽃", "빨래집 처녀" 각 3회, 이종명, 문이석, 남경전, 윤준희 각 2회
- 수필 : 나천수 6회, 이근화 6회, 박덕상 4회, 김철진 3회, 최승년 3회, 오성덕, 항인, DK생, 이일공 각 2회
- 희곡 : 서광제 3회, 나만성 2회
- 시조 : 이근화 7회
- 동요 : 오병남 2회
이상의 1930년대 중반 이후 목포 문단활동을 점검해 본 결과 먼저 한 작가가 여러 장르에 걸쳐 창작 활동을 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예컨대 이근화의 경우 북초(北草)라는 필명과 함께 시와 시조, 수필 분야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고, 나천수는 시와 수필에서, 박덕상은 시와 소설에서, 최승년은 시, 수필, 소설(1편)에서, 오성덕은 시와 수필에서, 나만성은 소설과 희곡에서, 오병남은 수필과 동요에서, 무두인은 시와 희곡(1편)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었다.
둘째는 시의 경우 지역성, 향토성의 소재가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즉, "목포찬가","목포 해안의 아츰","황혼의용당리","영산강 타령","달성사 종소리","포구의 황혼","해저문 포구"등이다.
셋째로는 소설 명칭의 다양성을 들 수 있다. 단편, 중편소설이라는 명칭은 원고량에 따른 일반적인 분류라 치더라도 애정소설, 대중소설, 가정소설, 탐정소설 등 작품의 성격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고 심지어 번안소설도 등장하고 있었다. 희곡 또한 1막 희극, 라디오 드라마, 발성영화 각본 등 다양했다.
넷째로는 비평 분야의 취약성을 들 수 있겠다."호남평론"에 본격적인 비평이 등장한 것은 1936년 11월호부터이다. 장효근의 '문예와 인생", 이석의 "학예 문화 옹호의 자유사상론"이 그것이다. 이어 12월호에 김인화의 "문학의 감동성", 1937년 1월호에 박병선의 '시인 제씨에게 일언, 대중이 요구하는 작품을!", 3월호에 김인달의 "연극의 민중예술성", 8월호에 남촌의 "문학방법론" 정도였다.